김정헌
KIM Jung-Heun
<생각의 그림>
그림은 생각이다. 또 그려진 그림들은 또 다른 생각을 만들어 나간다. 나에게 있어서 생각들은 이야기와 동의어이다. 그러므로 나는 ‘호모사피엔스 사피엔스’의 직계자손이면서 공동체주의자 매킨타이어(A. MacIntyre)가 말한바 대로 ‘서사적 인간’이다.
나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 많은 생각을 한다. 아니 생각을 굴리거나 떠올린다. 많은 생각들이 나에게서 숭숭 빠져 나가지만 어떤 생각들은 이미지와 접속되면서 이야기를 만든다. 반대로 이야기를 만들면서 이미지(상)를 만들기도 한다.
생각은 정신적 영역이다. 물감으로 나타내는 형태와 색채는 물질이다. 정신을 물질로 응고시키는 작업이란 지난하기 그지없다. 내가 그려 온 많은 그림들은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잡다한 생각들의 결과물들이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시대와 사회가 혼란스럽고 나의 삶의 언저리가 잡다하기 때문에 나의 생각들도 ‘잡다’하다.
생각의 파편들이 널뛰기를 하고 옛날 기억들을 소환해 현재와 미래의 일에 두서없이 연결시키기도 한다. 또 반대로 과거를 되살려 현재와 미래를 환치하기도 한다. 삶의 변두리와 낯선 곳을 헤매기도 하고 가끔가다 정치적인 욕망의 포로가 되기도 한다. 모든 생각들은 혼란스러워 거의 정신분열증에 가깝다.
내 작품들의 대부분은 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와 연결돼 있는 잡다한 시대적 과제물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내용적으로도 그렇지만 형식적인 표현 방법들도 각양각색이다. 표현 내용에 따라 그 방법을 그때그때 달리 사용했으니 그 결과물들도 잡다할 수밖에 없다. 잡초, 백제의 산경문(山景文)전, 산동네, 도시, 나의 가족들, 농부, 농촌, 마을, 동학농민혁명, 김남주와 정희성의 시, 역사 이야기, 파편화된 삶의 이미지 등 많은 주제들이 등장하고 그리는 방법들도 그때그때 달랐다.
붓으로 직접 묘사하기만이 아니라 의인화, 패러디, 혼성모방, 아이들이 좋아하는 스티커나 신문들을 오려 콜라주하기, 이미지의 겹치기나 충돌 등의 방법으로 모든 상징과 비유를 총동원한다. 주로 유화와 아크릴 등을 사용해서 전통적인 타블로 그림을 그렸지만 때로는 걸개그림, 야외벽화, 설치 등으로 그 영역을 넓히기도 했다. 엉뚱하게도 풍자극으로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
나의 생각은 깊은 사색이나 사유라고 할 수 없는 짧고 단편적인 것들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짧은 생각들은 곧 그림으로 전환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짧은 단편적인 생각들도 그냥 공짜로 얻은 것은 아니다. 나의 생각에는 우리가 인문학이라고 부르는 많은 책들이 뒷받침된다. 나는 뛰어난 독서가는 아니지만 책읽기를 좋아하고 다른 사람의 글에서 많은 영감을 받는다. 그러니까 이 혼란한 세상(언제 혼란하지 않은 세상이있었겠는가)을 이해하는 방법으로의 책읽기는 언제나 나의 그림에 기초가 된 것이다. 미술대학 시절 한 번도 그림이 무엇인지, 우리가 사는 세상에 그림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배우지 못한 나로서는 이런 책읽기를 통해서 독학할 수밖에 없었다
그림은 그리는 행위를 할 때 순간적으로 결정될 때가 많다. 여기에는 감각적인 사고가 끼어든다. 아니 끼어든다고 하기보다는 순간적이지만 감각적인 세계가 지배할 때 자연스럽게 벤야민(W. Benjamin)이 말한 바대로 미메시스적 능력이 발휘된다. 세계와 자연과의 순간적인 교감이다. ‘그리스인 조르바’가 들풀, 돌, 빗물과 춤으로 대화를 한다고 큰소리치는 것도 다 이런 자연과의 교감에 능통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자연을 원전으로 하는 나의 생각들에는 이런 자연과의 교감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다. 이런 생각들은 느닷없이 툭 튀어 나오기도 하고 고양이처럼 야금야금 기어 나오기도 한다. 이런 생각들이 사회의 산물들, 풍경들, 현상이나 사건들과 만났을 때 어떤 구체적인 형태와 색채를 갖게 되기도 한다.
나의 많은 그림들은 농촌과 관계를 갖고 있다. 나는 평양에서 낳고 부산에서 살다 거의 대부분을 서울에서 산 전형적인 도시형 인물이다. 그런데 어떻게 농촌 그림들을 그렸는가? 그림이란 어차피 자기가 가상한 이상세계를 그리는 것인데 나는 농촌과 마을을 나의 유토피아로 가상했기 때문일 것이다.
70년대 후반부터 산업화, 즉 압축적 근대화로 마을 공동체인 농촌 사회는 붕괴되고 해체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어째든 이런 농촌의 붕괴는 나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했고 나의 그림의 반 정도가 농촌 그림이 된 것이다.
김정헌
1946 년생, 서울 출생
학력사항
1977 서울대학교 대학원 회화과 졸업, 서울, 한국
1972 서울대학교 회화과 졸업, 서울 한국
주요 개인전
2016 생각의 그림 · 그림의 생각, 아트 스페이스 풀, 서울, 한국
2004 백 년의 기억, 인사아트센터, 서울, 한국
1997 김정헌 미술전, 학고재, 서울, 한국
1993 땅의 길, 흙의 길, 학고재, 서울, 한국
1988 그림마당 민, 서울, 한국
1977 김정헌 작품전, 견지화랑, 서울, 한국
주요 단체전
2017 70 청춘展, 나무아트, 서울, 한국
2017 불안의 시대 그리고 그 이후, 홍익대학교, 서울, 한국
2016 FROM POINT TO PENTAGON, 인디프레스, 부산, 한국
2016 사회 속 미술 – 행복의 나라, 북서울시립미술관, 서울, 한국
2016 별별수저, 서울시립남서울생활미술관, 서울, 한국
2015 광복 70주년 기념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서울, 한국
2014 강북의 달, 북서울 시립미술관, 서울, 한국
2012 유체이탈; 유신 40주년 전시회, 아트 스페이스 풀, 서울, 한국
2010 ‘현실과 발언’ 30주년 전, 인사아트센터, 서울, 한국
2007 민중의 힘과 꿈: 청관재 민중미술컬렉션 전, 가나아트센터, 서울, 한국